180302_금요기도회 설교 / 365장 마음속에 근심있는 사람
본문 : 고후 1:12-22절 / 제목 : 일이 꼬여만 갈 때 아멘! 합시다.
설교: 황성구 목사
(고후 1:12-22)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계획한대로 일이 안될 때 그것을 실패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세웠던 계획은 모두 어긋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길이 막히고 일이 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이 막고 계신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오해는 쌓여만 가고,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일이 꼬이고 어긋나는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은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이끌려 왔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더 큰 무엇인가를 미리 준비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길을 늦추시고 꼬이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만 있을 뿐이지 “아니오” 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오늘 아침 예스라고 말씀하시고, 저녁에 안 되겠다 “노”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 후서 1장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전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행 18:1-11) 고린도라는 도시는 70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작은 도시였습니다. 또한 그 가운데는 아직도 노예로 사는 사람들, 노예로 살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2/3정도가 되는 수준이 낮은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항구도시로 상업과 무역이 번창했으며 2만 명을 동시 수용하는 야외극장, 12개의 우상 신전이 있었으며 1,000명 정도의 신전매춘부들이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는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즉, 돈이 많은 도시, 우상숭배로 가득한 도시가 바로 고린도입니다. 이런 곳에 세워진 교회이고, 성도들이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은 항상 뜨겁고 간절했습니다.
자기가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성도들로부터 오해를 당하는 바울은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입장을 변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쓴 본문이 바로 고린도 후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하고 나서 떠나고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이나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노골적인 인신공격을 시작합니다. 바울이라는 인간은 자기에게 좀 유리하다고 하면 한다고 했다가 조금 불리하다고 하면 안하는 이중인격자라는 비난이었습니다. 어리고 수준 낮은 성도들은 색안경을 쓰고 바울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2절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 1:12, 쉬운 말) “우리의 자랑거리는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때, 특히 여러분과의 관계 속에서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실함과 거룩함으로 해왔다는 것을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세상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의 마음을 자랑스럽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였다.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 즉, 그 마음에 어떠한 간교나 속임이 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대하듯이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하였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함은 어떤 이권이나 보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욕심이나 자신의 지혜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마지막 판단을 주님께 맡겨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해받고, 억울할 때 참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 억울해서 호소했는데, 오히려 나의 상처만 더 커집니다. 그 억울함 때문에 마음아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날 우리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게 되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하던 일을 포기해 버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은 자신에 대한 오해나 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지막 판단을 주님께 맡겨두고 살 수 있게 합니다.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두 번째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두 번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애당초 계획이었습니다. 즉 바울의 원래 계획은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체류 -> 마게도냐 -> 고린도 방문, 겨울동안 체류 ->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후원을 받아 다음예정지로 출발’ 이었습니다. 즉 고린도를 거쳐서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를 거쳐서 유대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를 써 보낸 후 그 계획을 바꿨습니다. 그것이 오늘 15~16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실 바울의 계획변경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도 2차 전도여행 계획은 소아시아였지만 사도행전 16장 6-7절 말씀처럼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소아시아에서의 전도를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향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순종하고 움직일 뿐이 다는 것을 말씀함으로서 결코 자신이 편리한 대로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과 행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있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자신에 대한 해명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그 고백이 다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뢰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동의 근거를 하나님의 미쁘심, ‘신실하심’에 두고 있습니다.
18절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미쁘시다(πιστός)”는 말은 믿음이 많다, 믿을만하다,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따라 항상 ‘예’만 하기를 원합니다. 그가 지금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할 계획을 변경해야 함은 어떤 육체적 소욕을 따라 행함도 그가 신실하지 못한 변덕스러운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또다른 계획하심을 이루기 위해서 변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에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죽기까지 ‘예’로써 그리하였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심정은 다른 방법이 있으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구원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잔을 마시는 것이 그의 몫일진대 아버지의 뜻대로 ‘예’로써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바울 또한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항상 하나님 앞에 ‘예’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 지방을 두 번 방문하는 것이 그의 원함이었지만,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보였습니다. 바울은 그 뜻을 따라야 하는 그의 행동, 즉 계획의 변경을 고린도 교인들이 순수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바울의 바람과는 달리 일은 꼬이고 꼬여서 그를 반대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위시한 반대파들에 의해서 바울이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육체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되어지고 있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 인간의 계획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변경되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는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도 우리 인간의 생각에는 더디 오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아멘’으로 대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21-22절에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변경된 여행계획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변론하는 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우리들을 위한 변함없는 구원계획에까지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구원하시는 증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보증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보증(ἀρραβών)이라고 함은 어떤 일을 확실히 수행할 것을 약속하는 증표입니다. 집을 매매할 때 집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팔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는 계약금 혹은 선불금(downpayment)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 계약을 확실히 이행하시겠다는 표시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그것을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증거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셔서 치유와 회복은 물론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증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도움없이는 사탄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이 참 내 계획과 생각대로 호락호락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식도 사업도 모든 세상일에 대해서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여러분이 진심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내 인생을 인생의 경영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운영하시고 그 속에서 아주 작은 먼지 같은 존재인 내 인생도 손에 쥐고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지금 한순간 내 생각으로 볼 때는 너무나 꼬이고 꼬여서 '아니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눈을 들어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지금 이 시간은 나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인생으로 밀어 넣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보기에는 '아니오'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예'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어떤 일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예'하는 인간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내 인생을 어느 쪽으로 끌고가도 간섭하신다고 해도 오직 '예'라고만 응답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시 가져가신다고 해도 '아니오'라고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때문에 “아멘”을외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 없이 복음 때문에 매 맞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배우게 된 '아멘'의 지혜를 우리들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오'할 수록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예’가 되어주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에게 ‘예’가 되어주신 것 같이, 또한 바울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예’가 되려고 힘썼던 것 같이,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일에 ‘아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춘추시대에 위나라에 미자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이 준수하게 생겨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미자하를 찾아와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위나라 국법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임금의 허락 없이 사용한 사람은 발이 잘리는 월형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자하는 다급한 나머지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갑니다. 뒤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은 미자하에 대하여, “효자로다. 어머니를 위해 다리가 잘리게 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니!” 하며 칭찬합니다.
하루는 임금을 모시고 과수원으로 갔습니다. 미자하가 복숭아를 하나 집어서 먹는데, 하도 맛있어서 자기가 먹다가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셔보라고 올립니다. 그러자 임금은,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는구나. 제 입에 넣었던 것도 잊고 나에게 주니!” 하고 그의 임금 위하는 마음에 감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미자하도 늙게 되고, 임금의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하가 잘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임금은 미자하를 보고 말합니다. “이놈은 일찍이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내 수레를 탄 일이 있었고, 또 지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내게 먹게 한 일까지 있었다.”고 욕합니다. 미자하의 행동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칭찬 받던 일이 죄를 얻게끔 된 것은 미묘한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미움의 변화 때문인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에 드는 동안은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아 더욱 친하게 되지만, 한번 임금에게 밉게 보이게 되자 미자하의 생각이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게 되어 더욱 멀어진 것입니다(「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
여러분은 어떤 마음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성령님보다 내 지식이나 능력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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