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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부 설교

시편 25:1-22절, '주를 바라보았더니'

by 주쫑 2018.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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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1-22절, '주를 바라보았더니' 찬 20, 321, 375장

수요예배 설교 (2018.11.28)

황성구 목사



(시 25:, 개정) [1]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여러분 혹시 3행시를 지어 보신적 있으신가요? 오늘 제 이름으로 3행시를 한번 지어보려 합니다. 한 글자씩 띄워주시겠습니까?
황: 황송할 뿐입니다. 오늘 설교를 잘 해야 하는데,  / 성: 성경 읽고 설교도 하기 전에 삼행시라니요. 
구: 꾸꾸 까까~ 귀엽게 봐주세요. ^^


우리 한글은 자음 14개와 모음 10개로 글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모두 22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시편 25편이 바로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매 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 22자가 차례대로 나오는 22행시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시를 답관체라고 한다. 총 9개의 시가 있는데,( 9, 10, 25, 34, 37, 111, 112, 119, 149편) 알파벳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 이런 시도를 했을까? A~Z까지 히브리어의 모든 첫 글자부터 끝자까지 썼다는 것은 모든 삶의 모든 상황, 계획, 생각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있다는 고백이다. 내 눈에는 요것밖에 안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도와주시길 원하는 시가 답관체 시이다.

오늘 시편 25편의 저자는 다윗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울은 누가 봐도 왕처럼 보였던 인물입니다. 
(삼상 9: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하지만 사실 다윗의 위대함은 그의 지혜나 용맹함, 지도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왕같은 외모도,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사람들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행 13:21-22, 개정)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다윗의 강점을 뽑으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잘 바라보았던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25편에서 다윗은 대적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원수들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의 기도는 어떤 내용일까요?
‘원수를 물리쳐 주십시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다윗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시편 25편은 전체적으로 볼 때 다른 시편 말씀과 달리 아주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을 직접 부르고 있습니다. 
1절 처음 시작에서부터 “여호와여” 하더니 마지막 22절에서도 “하나님이여”라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간 중간 거듭거듭 되풀이해서 “여호와여”, “주여”라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간절함이 클 때 우리는 ‘주여’를 자주 하게 됩니다. 
또 거의 모든 구절에서 “나”나 “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편 25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과 형편을 하나님께 알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 다윗이 거듭 반복해서 하나님을 직접 불러가며 알리고자 하는 자기의 개인적인 사정과 형편이 무엇이겠습니까?
[19]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원수들로 인한 고난 때문에 외롭고 괴롭다(16절), 마음에 근심이 많다(17절)고 합니다. 이런 힘든 중에도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가장 큰 복은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다. 적들은 눈에 보이고, 문제는 눈에 보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참 힘든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르짖어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큰 방해요소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로 부터 도움을 받을 줄 알고 두 마음을 품고 요동하는 것이다(약 1:6-8)
(약 1:6-8, 개정)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잘 알려주는데, 아무래도 이상하고, 잘못 간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재탐색이 필요하다. 엉뚱한 길로 자꾸만 가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재탐색‘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여"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에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저들의 행동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 하나하나를 언급하며 잘못을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우러러보다'는 말은 히브리어 '나사'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들어올리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I lift up my soul'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나의 영혼을 당신께 올려드립니다'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드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본다는 고백입니다. 미완료형으로 그 행위를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올려드린다는 것은 제사중에 '거제'에 해당됩니다. 즉, 하나님 나를 하나님의 제물로 받아주세요. 라는 기도의 표현이 '우러러 보나이다'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도우심과 개입이 없다면 대적들, 원수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를 바라보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주를 바라봄으로 인해 빚어질 결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고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라고 합니다. 대적에게 패하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원수들이 나로 인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도자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원수들이 개가를 부르는 것은 원수들이 더 옳다고 인정받고 기도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는데, 내가 엉망으로 산다면, 나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개가를 부른다'는 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이웃나라들이 보면 이스라엘은 참 우습기만 합니다. 가나안땅까지 간다고? 어떻게 가! 우리의 밥이 될거야! 라고 덤벼드는 적들에게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실하심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4-5절에는 많은 반복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배우고 싶은 것을 3번 반복하며 그 의미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주의 도, 주의 길, 주의 진리)입니다. 또한 '네번'의 간구가 나오고 있습니다. "내게 보이소서', '내게 가르치소서', '나를 지도하소서', '나를 교훈하소서' 유사한 의미의 단어로 평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의 진리'는 하나님의 인격에서 나오는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단순히 지적인 의미의 '진리'가 아닌,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격적인 태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진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역사가운데서 도우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주의 도’와 ‘주의 진리’를 다윗은 삶을 통해 체험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5절의 '나를 지도하시고, 나를 교훈하소서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하신다'는 것은 '다라크'라는 단어인데, 밟다, 행진하다, 나아가다, 인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구약성경에서 63회가 나오고 있는데, '밟다, 행진하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토 혹은 대상에 발을 디딘다는 것과 관계있는 말입니다. 즉, 신명기와 여호수아에서 이 동사는 약속의 땅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발바닥이 밟는 모든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을때 사용합니다. 즉, 발을 내 딛게 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 발을 내 딛게 하셨습니다. 또 바벨론에서 에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을 내 딛게 하셨습니다. 발을 내 딛을 곳은 주의 진리입니다. 이제 그 실제적인 그 진리의 길에 발을 내 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훈하소서'라는 말은 '가르치고, 배우고, 훈련한다'는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배워서 몸에 베어 '훈련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진리 안에서 반복해서 걷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주의 말씀을 배우고 배워서 반복해서 익힌 후에는 주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행하는 것과 행함을 반복해서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6절입니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자신의 힘으로는 주의 말씀을 배우고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라함'이라는 단어로서 '자궁의 의미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애정에 찬 자비, 불쌍히 여김의 표현이다. '인자'는 자비, 자애,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주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헤세드-사랑)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7절에서 이렇게 요청하고 있다.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근거로 내세우며 자신을 기억해주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항상 그렇게 용서해 주신 것에 근거해서 자신의 죄와 허물도 기억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젊은 날 자신이 하나님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했던 그 죄가 떠오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방해하는 것들이 떠오릅니다. 이제 다윗의 의지할 것은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밖에 기댈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를 더욱 바라보며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8-10절]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이제 다윗은 그의 기도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을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이런 복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9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인도함을 받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 
‘아나우’ - 가난한 , 고통받는, 비천한, 겸손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의 의도적인 결과로 주어진 ‘겸손’을 뜻합니다. 검나하게 자랑하지 아니하는 사람, 단지 그의 처지를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즉, 온유한 사람은  가난하고 고통받고 있지만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만 목을 빼고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겨 바른길에 올려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다른 길로 가려하면 다시 그 발을 들어서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의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기에 10절 말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가 되어 말씀안에 살기를 위해 노력하고 발버둥치며, 끊임없이 자신을 깨뜨리며 채찍질하는 사람, 하루 하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그 사람. 자신의 부족함을 내어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렇게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자와 진리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우리는 죄악이 크지만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습니다. 완벽하게 율법을 지켜서 그런 은헤를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온유한 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주를 바라보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해서 12~15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를 바라보는 자가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1.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시고, 2. 그의 영혼을 평안히 거하게 하시며, 3. 자손에게 땅을 약속하십니다. 
구약성경 시대에 땅을 상속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복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최고의 복을 약속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온유한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그의 영혼이 평안히 살게 된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자녀들도 부모들이 누린 그 평안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자손들에게 상속해주는 땅은 믿음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안에서 사는 그 땅을 그 자녀들도 상속 받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때로는 실수하면서도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힘입어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손들도 그것을 보고 배워 그 선하심 안에서 사는 법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 바라보는 자에게 주신 축복은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자연히 하나님을 피하게 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때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더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친밀하게 대하십니다. 깊은 교제를 나누려면 먼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두손을 높이 들어 올려 바라보아야 합니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자기 눈이 항상 여호와를 향한다고 신뢰의 고백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발이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은 항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세상을 보지 않고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킵디다. 왜냐하면 그의 발이 원수들의 그물에 걸린다 해도 주님께서 벗어나게 해 주실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발이 그물에 걸렸을 때도 뽑아 내 주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도 그 발을 뽑아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뽑아 주실 것을 믿기에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16-22절은 다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16절의 '내게 돌이키사', '17절의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18절에 '내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를 통해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근심과 괴로움을 다시금 토로합니다. 
21절 앞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주시고, 건져주실 이유,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해주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주를 바라보니'라는 말입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기다린다, 기대한다.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꾸준한 인내의 기다림은 위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하실 것을 확신있게 소망하며 끈기있게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고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22절: 이스라엘을 모든 환란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개인의 기도를 공동체로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에서 더 나아가 가정, 이웃, 직장, 나라와 세계로, 삶의 모든 환경으로 지경을 넓혀가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 시편 25편은 원수로부터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로 인한 어려움이 분명한데도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한 모습!  바로 이런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다윗의 이런 신앙을 배우서 우리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에게까지 주를 바라보는 신앙을 유산으로 상속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어떤 형편에서도 말씀안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가꾸어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프레드릭 놀란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기독교 탄압을 받고 원수들을 피해 도망쳤다. 언덕을 지나 계곡으로 쫓기는 데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마침 길 옆에 작은 굴이 보여 들어갔지만, 두려움이 몰려왔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다가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매달렸다. “주님, 제가 이렇게 죽는 건가요? 제 사명이 이것으로 끝인가요?”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거미가 나오더니 굴 입구에 거미줄을치기 시작했다.  거미는 순식간에 굴 입구를 가로질러 거미줄을 쳤다. 그를 쫓아오던 자가 굴 앞에 멈춰 서서 굴을 살폈는데 입구에 거미줄이 쳐 있고 줄을 건드린 흔적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냥 지나갔다. 그들이 떠난 후에 굴에서 빠져나온 놀란은 이렇게 감탄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미줄도 성벽과 같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성벽도 거미줄 같다.”
당신은 두려운가? 빛이시요 구원이시며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그분과 교제하고 예배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간절히 아뢰라.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미줄도 벽과 같다. 그분이 우리로 능히 두려움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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